산중의 봄꽃들은 도시에 비해 조금 늦게 찾아온다. 한낮에는 언 땅이 녹으며 질컥거리는 면이 있지만, 땅속은 아직도 얼음덩어리처럼 굳어서 깊은 뿌리를 움켜잡고 놓아주지 않으니 봄물을 길어 올릴 수 없는 것이다. 산중은 낮과 밤의 기온 차이로 인해 나무마다 몸살을 앓다가 어느 순간 깨알만 한 꽃망울을 보여주면서 차차 콩알만 해지다가 마침내 견딜 수 없다는 듯 터진다.

속앓이가 심해서 그런지 산중의 꽃들은 유난히 선명하고 고운 빛깔을 띤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꽃잎마다 “날 쉽게 잊지 말아요.” 귓속말로 속삭이듯 수줍게 피어있곤 한다.

며칠 전에 도시의 골목길을 걷고 있을 때 필자는 다소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다. 맞은편에서 지팡이를 짚으며 걷다 서기를 반복하던 한 노인께서 무작정 필자를 붙들고 하소연하는 것인데, 잠깐이었다.

동네에 있는 공공기관의 큰 건물 앞마당을 운동 삼아 걷다가 잠깐 벤치에 앉아서 보니까 한 나무에 티눈만 한 꽃망울이 맺혔더란다. 그런가 보다 하고 별생각 없이 다시 그 앞마당을 지팡이에 의지해가면서 섰다 걷기를 반복하다가 다시 그 벤치로 돌아와 앉았는데, 세상에 그사이에 그 꽃망울이 잠시를 못 참고 터져버렸다고 한다. 너무 놀라고 황당해서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숨만 토하는 자신이 남사스러워서 그만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인생이 그 꽃망울처럼 한순간이어서 너무 허망하고 서러워서 눈물도 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잠깐이지만 누가 과연 이 극적인 상황 앞에서 이분을 위해 한마디 위로의 말이라도 건넬 수 있을까.

필자는 그 노인의 생각을 읽고 복잡한 감정이 흘러갔는데 아찔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는 꽃을 인생에 비유하곤 하지만 그분은 정반대로 피는 꽃을 통해서 인생의 찰나를 터득해 버렸으니 필자로 하여금 역발상의 위대한 발견을 하게 한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붙잡고 당신의 뒤를 돌아보는 일을 이야기할 만큼 생이 공허했으리란 것도 필자는 안다.

인간은 꽃을 통해 자신의 희로애락을 발견하고 자신의 감정을 꽃으로 대신 표현한다. 축하는 물론이고 기념식이나 애도의 자리에도 꽃과 함께한다. 병상에 누운 지인에게도 꽃을 들고 찾아가 쾌유를 빈다. 심지어 꽃을 꺾거나 돈을 들여 산 꽃을 화병에 꽂아 식탁이나 사무실에 두고 감상하는 걸 보면 꽃은 만인의 뮤즈이고 주술 같은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고흐는 조카의 출생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의미로 ‘꽃피는 아몬드 나무’를 그렸다. 두보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꽃을 통해 자신의 슬픔과 한을 토해냈다. 예술가들에게 있어 꽃이 주는 영감은 각별하다. 예민한 감성과 예민한 관찰력으로 표현의 정점에 이르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1921-1968)의 시 「꽃잎1」(1967)은 시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지기 1년 전에 쓴 작품으로 그 연약한 꽃잎이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 내릴’ 만큼 숭고한 것임을 보여준다.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 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 같고 /먼저 떨어져 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 같고

꽃잎은 조금 꺼진 듯 어두워도 곧 깨어나게 되고, 그래서 바윗덩어리 같은 큰 힘으로 떨어져 내릴 것이므로 결국 혁명 같은 것이 또한 꽃잎이다.

힘없고 죄 없는 꽃잎들을 무참히 짓밟은 군홧발과 아름다운 꽃가지를 마구 휘둘러 쳐내는 망나니의 칼끝은 다를 게 없다. 머지않아 그 꽃잎들이 다시 들고 일어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