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팬데믹 이후 지난해 실로 오랜만에 미국을 방문하면서 40년 가깝게 인연을 맺어온 두 분의 노(老) 스승님도 뵐 수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미국경제는 코로나19 전후로 노동과 자본의 몫은 점차 줄어들고 금융의 약탈적 대출, 시장 조작과 내부자 거래 등으로 지대소득의 비중이 커져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임금이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미국 남동부에서 북으로 이어진 서로 다른 특색과 역사를 지닌 도시를 통해서 미국인들의 생활도 엿볼 수 있었다. 문득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가 떠올랐다. 작가는 주홍빛 바탕에 성 마르코 사자의 국기를 펄럭이는 ‘주홍빛 베네치아’, 은빛 아르노 강을 노래한 ‘은빛 피렌체’, 황금빛 테베레 강을 찬양한 ‘황금빛 로마’의 세 도시 이야기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도시의 풍경을 되살리고 있다. 이런 묘사를 인용해 몽고메리(Montgomery)는 인권의 역사를 간직하고 흑백의 평등과 자유를 위한 공민권 운동의 행적을 간직하고 있는 ‘인권의 도시’, 내쉬빌(Nashville)은 컨트리 뮤직의 본산에 걸맞게 도시 전체가 노래로 가득한 ‘음악의 도시’, 그리고 뉴욕시(New York City)는 황소 상의 월스트리트, 뮤지컬 시카고의 브로드웨이, 세계 광고 전광판의 타임스퀘어로 대표되는 세계 금융, 경제, 문화, 예술, 패션의 중심지 ‘빅애플(Big Apple)의 도시’로 세 도시 이야기를 그려 보았다.

몽고메리 거리의 첫 느낌은 애달픈 역사를 간직한 도시로 기억한다. 앨라배마주의 주(州)도로서 목화재배의 주산지이며 앨라배마 강이 흐르고 있으며 강변의 항구(High Red Bluff)는 1821년 최초로 증기선(Harriett)이 도착한 곳이고 면직물을 수출하는 통로로 지금은 관광 유람선이 다니고 있다. 몽고메리는 1860년 남북전쟁 때 남부연합이 결성돼 초기 남군의 수도로 초대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 집무실이 보존된 남북전쟁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1965년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인권 행진을 했던 기념비적인 장소이다. 내쉬빌은 컨트리 가수를 꿈꾸거나 음악을 전공하려는 젊은이들이 한번은 방문해야 하는 곳으로 도시 전체가 음악이 흐르는 역동적인 도시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테네시주의 주도로 컨트리 뮤직 성지인 라이먼(Ryman) 오디토리움과 컨트리 음악 명예의 전당과 박물관, RCA 스튜디오B 등이 랜드 마크로 미국 컨트리 음반의 대부분을 제작했다. 그리고 도시의 거의 모든 펍이나 식당들이 밤새 독자적인 밴드를 공연하고 있을 정도로 사시사철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은 곳이며 올해 CBS 방송의 새해맞이 축하행사가 열릴 정도로 음악의 성지인 곳이다. 지금 남부는 옛날 목화밭에서 앨라배마의 현대차와 LG 전자, 조지아의 기아차와 한화 큐셀, 현대전기차와 LG 배터리 공장(건설 중), 테네시의 SK 이노베이션 등 한국 기업들이 단독이나 합작으로 생산하는 산업단지로 거듭나고 있다. 이전에 한국기업들은 중국에 투자했지만 미·중 패권구조에서는 살아남을 방책을 미국에서 찾고 있다.

뉴욕은 절대 잠들지 않는 도시(The City that never Sleeps)라는 애칭이 인상적이다. 조선 말기 민영환은 명성황후 시해(1895)와 아관파천 직후 1896년 4월 국운이 절명한 시기에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을 위해 태평양을 건너 러시아로 가는 도중에 5월6일에 뉴욕에 도착했다. 그들 눈에 비친 뉴욕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9일 유럽으로 향하는 영국 상선 루카니아 호(The Lucania)를 타기 전 머무른 짧은 기간에 민영환은 총 204일간 세계일주 기행문 해천추범(海天秋帆·조재곤 편역)에서 ‘장춘원리무욕지(長春園裡無慾地) 불야성중극낙천(不夜城中極樂天)’인 “긴 봄 동산 속에 근심이 없는 곳이고 밤이 없는 성안의 극락 같은 하늘”이라고 당시 300만 가까운 주민이 거주하는 뉴욕의 첫 인상을 묘사했다. 그러나 현대사에서 9·11 테러로 붕괴된 쌍둥이 세계무역센터 자리에 세워진 3천여 명의 희생자 이름이 새겨진 추모의 공간은 큰 슬픔의 장소로 남겨져 있다. 우리가 눈 여겨 볼 것은 8.4km의 맨해튼과 스태튼 아일랜드 사이를 오가는 페리 명칭을 ‘Dorothy Day’라 부르고 기부자의 뜻으로 현지인과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운영돼 외국인들에게도 즐거움을 주고 있다. 이처럼 도시들은 시오노 나나미가 묘사했듯이 ‘선과 악, 미(美)와 추(醜), 고상함과 저속함’이 교차하는 양면성을 지닌 사람들의 자취를 담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도시 이야기를 통해서 낡은 것들이 남아 있으면서 새로운 것들이 출현하는 진화의 시간과 사람들이 살아 왔던 흔적을 간직한 역사와 문화가 만들어진 창조의 공간을 담고 있는 도시의 궤적을 다시 돌아 볼 계기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