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옛 친구들과 만나 소박한 점심을 나눈 후 버스 정류소에 앉았다. 가지런한 노란 의자는 앉았다가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반질반질 빛이 난다. 가을이 농촌의 들과 산에는 금색으로 오고 도시의 아파트에는 회색으로 오나 보다.

도로 건너편 허름한 이 층 건물엔 때 묻고 빛바랜 간판 글씨가 흐릿하다. 아마 건물 간판의 나이와 건물 주인의 희망 나이가 같을 것이다. 간판을 보고 몰려올 인파의 숫자를 셈하며 아침이 밝아오고 석양의 가을 낙엽을 쓸어모아 계절을 결산하며 간판은 저렇게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정류소 바로 옆 오층 건물을 층수 따라 올려다보니 옥상 정면 벽에 **동물메디컬센터라고 쓰인 큼지막한 글씨가 맞은편 해진 간판 글씨를 압도하듯 도도하다. 인간 세상에서나 익숙한 상호가 동물에게까지 사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이질감이 자꾸 뇌리에서 무게를 더해간다. 인간영역이라고 강변하고자 하는 나의 노회한 심리 현상일 것이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외과수술센터, 영상진단센터, C.T, M.R.I, 응급 의료센터라고 친절하게 안내를 하고 있다. 입원실과 장례식장만 완비하면 인간이 사용해도 될 법한 구조를 갖췄다.

입원실은 왜 없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중년 부인이 때마침 희고 귀여운 강아지를 안고 그 센터를 들어선다. 호기심이 치솟아 함께 들어가 보기로 했다. 들어서는 모습만 보면 마치 그 강아지가 중년 부인을 엄마라고 부른다면 나는 그 강아지의 아빠인 것처럼 거의 동시에 들어섰다. 대부분의 반려견이 자녀라는 호칭으로 호명되는 시대인지라 나 또한 입구에 들어가는 순간 강아지 아빠로 보였을 것이다. 간호사가 강아지와 부인과 나에게 ‘어서 오세요’라고 환한 인사를 했으니까.

화살표로 표시된 팻말에는 진료실, 수술실, 회복실이라 표기돼 있고 진료 중인 환자 명단에는 강아지 이름이 열 지어 적혀 있다. 톰, 케리, 스팡, 글렌, 톰슨 등 아픈 개들은 모두 고향이 한국이 아닌가 보다. 오른편 넓은 벽면에는 환자의 보양식이나 각종 병증 치료를 위한 처방식 들이 진열돼 있는데 그 밑에 형형색색의 봉지들에는 모든 글씨가 영어로 표기되어 있었으므로 고향이 한국이 아닌 강아지들에게 알맞은 표기일 것이다. 잠시 강아지 아빠가 됐다가 왜소해져 버린 나는 다시 버스 정류소로 돌아와 앉는다.

정류소 앞을 지나는 허리 굽은 할아버지의 오른손엔 검은 비닐봉지가 하나 흔들거리며 매달려 간다. 아들딸들을 강아지 손자에게 빼앗겨 버린 할아버지의 공허증 치료식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저만치 멀어질 무렵 내 친구가 어느 날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상의할 것이 있다며 꺼낸 말이 생각난다.

딸아이가 결혼을 하면서 기르던 강아지를 잘 길러달라며 맡기고 갔는데 수개월이 지난 후 집안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게 뒤틀어져 버렸단다. 외출에서 귀가하면 격하게 반긴다던가. 온갖 재롱을 부릴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랑의 포로가 되어 신음 중인데 행복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단다. 또한 강아지의 분리불안 증세가 심해질까 염려되어 모임에 나갔던 두 내외가 안절부절 못하여 급히 집에 돌아와야 하고 아이 돌보듯 강아지의 뒷정리를 해야 해서 편안했던 부부 대화가 살벌해지려 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하는 것이다.

나의 답은 이러했다.

“친구여! 다른 대상을 미워하는 것도 고통이지만 격한 사랑도 또한 고통이라네. 이제 우리는 우주가 지구를 사랑하듯 지구가 모든 생명을 사랑하듯 자연이 계절을 사랑하듯 온유하며 은은한 사랑을 할 나이가 아닌가? 또한 강아지의 일생은 십여 년이 정명인데 그가 먼저 자네의 곁을 떠나는 날 그 슬픔을 어찌 감당하려 하는가. 그를 행복하게 하려면 같은 생명들이 함께 뛰노는 세계로 보내주게. 인간은 인간 세상이, 동물은 동물 세상이 낙원이라네. 애견센터에 맡겨 방법을 찾아보게. 자네마저 애견센터에 입소하지는 말게.---”

전화 통화를 하고 난 수개월 후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애견센터에 맡긴 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동안 매일 오전이면 애견센터 창가를 서성이게 되더라.’라며 그 증세가 멎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는 이야기다. 나의 충고를 가볍게 듣고 함께 애견센터에 입소해 버린 것이다.

내 친구가 강아지 아빠가 되는 일이나 친구와 형제처럼 지내는 내가 강아지 삼촌이 되는 것만은 단호히 사양한다. 인간으로 살아야 할 소명이 너무 크기도 하고 의인화(擬人化)되어 사람이 강아지에게 그렇게 부르도록 요구하는 모습은 마치 나의 언어를 탈취당하는 것 같아 허전하다. 훗날 가족관계 증명서에 강아지의 이름이 등재되는 시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동물메디컬센터 옆 정류소에 회색 도시를 돌아 회색 인간을 싣고 개띠인 내 앞에 멎었다.





<윤영식 약력>

▲시인, 수필가

▲광주수필문학회 회장

▲광주문인협회 회원